이 섬에 이렇게 오래 머무르게 될 줄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현지인’이 될 줄도 몰랐다. 2년 전,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제주도에 첫 발을 디딘 민애 씨 이야기다. 민애 씨는 제주도에서 지내면서 수십 가지 알바를 뛰었다. 다양한 알바를 경험하는 동안 제주에서 수많은 이웃들을 마주쳤고, 이제는 동네 골목골목을 지날 때마다 반가운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됐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시작했던 외로운 타지 생활은 그렇게 제주의 강한 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짙푸른 군청색의 바다를 끼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의 한 민박집에서 알바생으로 일하고 있는 민애 씨를 만났다. 챙이 넓은 모자를 옆으로 치켜 올리며 골목길로 마중 나온 그의 모습에서 제주 생활의 익숙함과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어쩌다 제주로 오시게 된 거예요?
사실 계기는 좀 단순해요. 남자친구가 제주도에 가서 1년만 한 번 살아볼까 해서 따라오게 됐어요.
처음에 제주로 올 때 걱정되진 않으셨어요? 다들 한 번쯤 ‘제주살이’를 꿈꾸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용기 내기 어렵잖아요.
저도 처음엔 걱정이 많았어요. 제주도가 섬이다 보니 육지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도 했었고요. 인터넷에서 그런 글들을 봤었거든요. 저는 사투리 때문에 외지인인 게 딱 티가 나서요.
고향이 어디신데요?
거제에서 태어났고 부산이랑 대구에서 살았어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고요.
그럼 아예 회사 생활을 관두고, 제주행을 결심하신 거예요?
조금 무모한가요? 하하. 그런데 저는 사실 회사 생활하는 내내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거든요. 그래서 큰맘 먹고 일하던 회사도 그만두고 온 거고요. 사실 제가 봐도 진짜 대책 없긴 했어요. 막상 와서 이리저리 구직 사이트를 봐도 제가 갈 만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거든요.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일단 알바라도 해야겠다고 한 거죠.
제주에서 알바 구하기 어렵진 않으셨어요?
인터넷에 정말 일자리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제주 사람들이 당근을 많이 쓴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당근으로 알바도 구한다고. 대구 살 때는 당근으로 중고거래만 했었는데, 여기 와보니 당근에 일자리가 정말 많이 올라와 있는 거예요.
그렇게 알바를 시작하신 거군요. 제주에서 알바는 얼마나 해보셨어요?
일일이 세어 본 적은 없는데 열댓 개 되는 것 같아요. 세계 선수권 대회 의전, 뮤지컬 행사장 안내, 마라톤 티켓 알바 같은 것도 많이 했어요. 제주에 그런 행사가 많아서 일일 알바 자리가 많거든요. 제주에서만 할 수 있는 귤 따기나 돌담 쌓기 같은 것도 해 봤고요.
돌담 쌓기를요? 제주도 분도 아닌데 돌담을 올려보신 거네요!
제가 처음 일하러 갔을 때 사장님이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돌담 같은 건 오랫동안 앉아서 섬세하게 작업해야 하다 보니까 젊은 여성분들을 선호하는데, 제주에 워낙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 일손이 귀하다고요. 제주에 있는 젊은 분들은 대부분 관광객이거나 한 달 살기 하시는 분들이고, 그나마 현지 분들은 대부분 식당이나 카페 같은 관광지에서만 일한다고요.
돌담을 자세히 보면 큰 돌 사이사이에 작은 돌들이 차곡차곡 끼워져 있잖아요. 그게 전부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맞춰 넣는 거더라고요. 큰 돌 먼저 쌓고, 그 사이에 생긴 틈에 또 다른 작은 돌을 메우면서 채워가는 거죠. 그래서 전에는 돌담 보면 그냥 ‘와, 예쁘다’ 생각했는데 막상 일해보고 나니까 ‘와, 고생했겠다’ 싶은 생각이 먼저 들어요. 하하. 직접 해보니까 하나하나가 다 정성이더라고요.
민애 씨는 돌담 쌓기를 한 바로 다음 날, 며칠 동안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민애 씨가 말한 돌담을 살펴보니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돌들이 서로를 지탱하며 단단하게 자리 잡고 서 있었다. 제주에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경험하며 낯선 장소에서 삶의 터전을 다져가고 있는 민애 씨의 모습과도 똑 닮아 보였다.
보통 수도권 벗어나면 일자리가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제주에도 일자리가 많네요.
처음엔 저도 ‘제주도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했을 때 떠오르는 게 정말 없었거든요. 근데 막상 와 보니까 오히려 일거리는 넘쳐나는데, 일손은 너무 부족한 상태더라고요. 생각보다 제주도에 할 일 정말 많아요. 귤 따기나 방역 같은 일을 할 때도 그랬어요. 젊은 사람이라고 엄청 반가워라하셨어요.
방역 알바는 어떤 거였어요?
제주도에는 주택이 많다 보니까 여름 되기 전에 방역을 많이 하거든요. 해충 처리할 수 있게 집 구석구석 방역하는 일이에요. 집집마다 들르면서 집 문 두드리고 부엌, 베란다 방역해 주고 사인받고 하는 거요. 저는 여기 살던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현지인 분들 문을 두드리면서 인사하고 집에 들어가고 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근데 신기한 게, 제가 인사하자마자 어디 출신이냐고 묻는 분들이 계셨어요.
어떻게 타지 사람인 걸 바로 아셨대요?
제 경상도 사투리가 심해서 ‘안녕하세요’만 해도 티가 난대요. 제주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면 되게 신기해하시고 기특해하세요. 젊은 사람이 이런 일을 다 한다고요. 언제 왔냐 어디쯤 사냐 물어보시는 분도 있고, 고생한다고 음료수라든지 귤이라든지 내주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현지인 분들 정말 많이 만나셨겠네요.
맞아요. 그때마다 제주도민분들이 엄청 반겨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알바도 더 자신 있게 하게 됐죠.
또 어떤 알바 해 보셨어요?
고양이 화장실 청소 알바도 했었는데요. 그분들도 저처럼 육지에 있다가 제주로 이사 오신 분들이었어요. 그런데 집을 비워야 해서 사람을 구한 게 아니고, 집에 계신데 너무 바빠서 청소를 못 한다고 알바를 부른 거예요. ‘얼마나 바쁘게 살길래 고양이 화장실 청소도 못 할 만큼 바쁠까’ 그러면서 가 봤는데 둘 다 스냅 사진 작가분들이더라고요. 방 한 칸에서 컴퓨터를 두고 내내 사진 편집을 하고 계셨어요. 쓰레기도 못 버리고, 청소도 못 하고요. 하루 종일 방안에서 편집만 하기도 바쁘대요.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 풍경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컴퓨터만 하는 게 좀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근데 이게 좀 웃긴 게... 그때는 제가 제주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제주 사는 분들은 다 여유로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저도 이것저것 일하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하하. 제주 물가 엄청 비싸거든요. 먹고 살려면 일해야 해요.
먹고 살기 위한 필연적인 노동. 민애 씨에게도 ‘알바’는 분명 돈을 버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주에서 해온 일들을 떠올리는 민애 씨의 표정은 친구들과의 재미있던 일, 여행지에서의 특별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처럼 해맑았다. ‘무슨 일 하세요?’ 누군가 물었을 때 이토록 반짝이며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민애 씨의 일자리에는 다양한 일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녹아 있었다. “제가 한 일요. 아무 말도 안 하고 혼자 하는 거면 솔직히 그냥 최악이었을 걸요.” 묵묵히 맡은 일을 하다가도 누군가와 한 마디 툭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순간, 평범했던 노동은 민애 씨의 일상을 더욱 생기 있고 다채롭게 물들이는 힘이 됐다.
여러 알바들 하면서 제주살이에도 적응하게 되신 거네요.
새로 이사 온 사람 입장에서는 제주도에 사는 분들 만나기가 좀 어렵잖아요. 그런데 저는 처음 오자마자 알바를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현지 분들이랑 친해지고 제주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는 게 있었어요. 일 끝나고 쭉 연락하고 지내는 경우도 있고요.
그럼 지금 하고 계신 민박집 알바는 얼마나 되셨어요?
이건 벌써 한지 1년 정도 됐어요. 한 주에 다섯 번, 여섯 번 나가니까 거기 사장님이랑 가장 자주 보고 많이 얘기하고 그렇죠.
민박집 사장님은 어떤 분이세요?
50대이신데 엄청 꼼꼼하셔서 저한테 일 시켜두고도 한 번 더 자기 손으로 청소해야 마음을 놓으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저 끝날 때쯤 항상 오세요. 일 끝나면 같이 점심도 먹고 하죠. 막걸리도 좋아하셔서 가끔은 제가 댁으로 태워다 드리기도 해요.
그 정도면 단순한 알바생이 아닌데요?
아무래도 제주에 와서 가장 오래 알고 지내는 분이니까요. 사장님이 가끔 먹고 싶은 거 있냐 하면서 사 주시기도 해요. 제가 언젠가 너무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는 걸 보셨는지 그 후로는 매일 아이스 커피를 사 오시더라고요. 한번은 사장님이 갑자기 전화 와서 ‘시금치 필요하냐’ 물어봐서 먹겠다고 했더니 밭에서 시금치를 바로 사 오신 거예요. 제주도에서는 밭에 무게를 달아볼 수 있는 저울을 두고 농작물을 바로바로 판대요. 무 슨 1kg 한 박스 이렇게요.
밭에서 무게 달아서 바로 가져가는 거예요?
맞아요. 되게 신기하죠? 어떨 때는 마트에서 장 보시다가도 전화가 와요. 복숭아 살 건데 저도 먹을 거냐고. 청소일은 힘들지만 이렇게 소소하게 챙겨주시는 게 되게 좋더라고요. 사장님 덕분에 더 이상 외지인이 아니라는 기분도 들었던 것 같고요. 저 최근에 이사할 때도 사장님이 도와주셨어요. 아무래도 외지인이다 보니 부동산 계약할 때 주의할 게 많았거든요. 근데 민박집 사장님이 아는 분 통해서 도움을 많이 주셨죠.
민애 씨는 민박집 이야기를 하다, 이게 무슨 감정이었는지 잘 모르겠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봐 달라고 했다. 민박집 청소를 시작한 지 어느덧 1년. 매일 같은 시간, 골목 한구석에 차를 세우고 익숙한 발걸음으로 민박집으로 향하던 민애 씨가 일을 잠시 쉬고 일주일 동안 부산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다시 민박집을 찾았을 때 민애 씨는 깜짝 놀랐다. “민박집 옆에 나무 밑집 할머니가 갑자기 저보고 어디 다녀왔냐고 하시는 거예요. 겨우 인사만 나누던 건너편 민박집 사장님도 찾아오시고요. 며칠 안 보이던데 어디 갔었냐고. 안 보이길래 무슨 일 있나 싶었대요.”
타지에서도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생겼구나, 그런 느낌이었을까요.
그러게요. 여기에도 내 자리가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나무 밑집 할머니는 사연이 더 있는데요. 한 번은 할머니가 민박집 근처 담벼락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면서 ‘맨날 텀블러에 음료 담아오는 거 힘들지 않냐, 여기서 과일 따 먹으면 시원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매일 텀블러를 들고 출근하는 걸 보셨다는 거잖아요. 말은 안 해도 나를 보고 있었구나, 그런 게 느껴지니까 좋더라고요.
흔치 않은 경험이네요. 누가 며칠씩 집을 비워도, 옆집 사는 사람들도 모르는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저도 대구 살 땐 그랬어요. 갑자기 어떤 집이 안 보이면 이사갔구나, 하고 마는 거죠. 그때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어요.
대구 사실 때는 지금이랑 많이 달랐어요?
일하기 바빴죠. 거기도 원래 살던 곳은 아니어서 일 끝나고는 놀 사람도 없고 가볍게 인사할 사람도 없어서 좀 외로웠어요. 매일 똑같이 8시에 나가서 저녁 8시쯤 집에 와서 씻고, 밥 먹고, 자고, 그랬어요. 사는 재미가 없었죠.
외로운 민애씨 모습이 상상이 잘 안되네요. 여기서는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요.
도시 살 때는 사람들은 많아도 내가 다 모르는 사람들이잖아요. 근데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잘 아니까 잘 지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제주에 살면서 동네에 한 명씩 인사할 얼굴들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솔직히 진짜 친한 친구들도 1년에 몇 번밖에는 못 만나는데 여기는 이웃분들하고는 거의 매일 마주치잖아요.
제주 생활에서 이웃들한테 좀 더 마음을 열게 된 거네요.
진짜 별거 아닌데, 동네 여기저기에 아는 분들이 있다는 게 든든한 것 같아요. 동네에서 지나가다 날 알아보고 눈인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좋고요. 저희 집 앞에 편의점이 하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당근알바로 편의점 일자리가 올라오면, ‘아, 여기서 일하시던 분이 그만뒀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한번 인지하고 나니 편의점에서 누가 일하는지, 어떤 시간대에 교대하는지 등을 자연스럽게 보게 돼요. 원래 같았으면 그냥 얼굴도 안 보고 ‘안녕하세요’ 하잖아요. 근데 한 번이라도 얼굴 보고 눈 마주치고 인사하다 보면, 뭐 ‘오늘은 늦게까지 하시네요’ 이런 얘기도 하게 되더라고요. 그것만으로도 동네에 안정감이 들고 외롭지도 않고요.
좀 더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변한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러게요. 제주 살면서 제가 조금 변했나 봐요. 하하.
앞으로 다른 곳으로 이사 가셔도, 여기서처럼 잘 적응하고 지낼 수 있을까요?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다르긴 할 것 같은데, 가능할 것 같아요. 앞으로는 다른 곳 가서도 이웃분들한테 먼저 말 걸고 듣고 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생각해 보니 전에 살던 대구에서도, 제가 조금만 먼저 다가갔으면 생활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왜 여기 와서 변하게 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게 제주도의 매력인 건지, 알바를 이것저것 많이 해서 그런 건지. 그래도 다른 지역에 살다가 제주도에 돌아오면 꼭 제 고향 같을 것 같아요. 어느 동네에 가면 누구랑 있었는데, 무슨 일을 했었는데, 이런 게 떠오를 것 같네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쩌면 민애 씨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제주라는 장소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렇게 산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까?’라는 질문에 맞설 용기가 없었다면, 동네 사람들과 함께 두 팔 걷어붙이고 일할 용기가 없었다면, 이 모든 새로운 여정은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민애 씨에게 울창한 야자수와 검은 돌담이 반겨주는 제주 들판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먹고 사는 현실적인 일터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동네 골목마다 쌓아온 이웃들과의 추억이 그 삶의 무게를 감싸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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