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으로서 혜정 씨의 일상은 조율의 연속이다. 끊임없이 달라지는 아이의 필요를 채워주고, 자기 삶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날들.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준 건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이웃들과 주고받는 물건들. 그 물건들로 혜정 씨는 생활의 빈틈을 자연스럽게 메우고, 때로는 마음마저 나누는 따뜻한 연결을 경험했다. 그런 순간들이 하나둘 쌓이자, 동네도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한때 그저 집과 회사를 오가는 길목에 불과했지만, 이젠 아이와 함께 하루를 살아가는 든든한 삶의 터전이 됐다.
워킹맘이신데 퇴근하고 나면 어떻게 시간 보내세요?
아무래도 아이 케어하느라 바쁘죠. 학원 다녀와서 바닥에 툭 던져 놓은 가방도 얼른 치우고, 하루 동안 뭐 했는지 얘기도 들어줘야 하고요. 그러다 보면 다음 날 필요한 준비물도 챙겨야 하고 정신없죠.
하루가 훅 지나가겠어요.
평일은 너무 바쁘니까 주말엔 아이랑 더 많이 시간 보내려고 해요. 근처에 맛집 새로 생기면 동네 산책 겸 같이 걸어가 보기도 하고, 날씨 좋으면 한강 나들이도 자주 가고요. 그러다 일요일 저녁쯤 되면 ‘출근하기 싫다~’ 이러면서 평일 준비하죠. 하하.
아이는 몇 살이에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인데 진짜 금방금방 크더라고요. 아이 옷이나 신발 같은 걸 사잖아요? 한 계절만 지나도 금세 작아져서 못 쓰는 경우가 많아요. 얼마 전엔 아이가 앉던 의자도 작아져서 새로 바꿨고요. 또 아이 키우는 분들은 알 텐데, 관심사도 얼마나 빠르게 바뀌는지 몰라요.
최근엔 아이가 어떤 거에 관심 있어 해요?
얼마 전엔 뜬금없이 드럼을 배우고 싶다는 거예요. 근데 엄마들은 대충 감 오잖아요. 며칠이나 갈까 싶었죠. 새 걸 사주긴 부담스러우니까, 중고로 전자드럼을 하나 가볍게 구해줬어요. 처음 찾아볼 땐 전자 드럼이 13만 원 정도 하길래 좀 더 기다려봤거든요? 며칠 지나니까 6만 원 대 물건도 딱 뜨더라고요. ‘이건 놓칠 수 없다’ 싶어서 비가 엄청 쏟아지는 날이었는데 얼른 가서 구해 왔어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두세 번 치더니 ‘엄마, 재미없어. 안 할래~’ 이러는 거 있죠?
귀엽네요. 아무래도 이것저것 호기심 가질 나이니까요.
역시나 싶더라고요. 결국 드럼은 다시 당근에 올렸어요. 그랬더니 50대 어르신이 오시더라고요. 취미로 드럼을 배워보고 싶으셨다는데, 마침 찾던 물건이라고 엄청 좋아하시는 거예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는 걸 보니까 괜히 뿌듯했어요.
그런데 며칠 전엔 또 전자 피아노를 사달라네요? 하하. 우리 애가 또 어디에 재능이 있을진 모르니까, 하고 싶어 하는 건 최대한 시켜주고 싶죠. 그래서 피아노도 당근으로 먼저 찾아보고 있었는데, 이번엔 며칠 안 가 금방 잠잠해지길래 그냥 넘어갔어요.
아이 관심사가 바뀔 때마다 다 챙겨주는 게 대단하세요.
아이가 저를 닮은 거 같기도 해요. 저도 취미 부자거든요. 한 번은 터프팅에 꽂혀서 터프팅 기계랑 털실들을 감당 못 할 정도로 잔뜩 샀었어요. 결국 다 못 쓰고 나중에 그대로 당근에 올렸죠. 요즘엔 또 다꾸를 시작해 볼까 싶어서 당근으로 찾아보고 있고요.
예전엔 뭐 하나 시작하려면 큰맘 먹고 했을 텐데, 요즘엔 뭐든 부담 없이 시작하는 것 같아요. 아이 거든 제 거든, 새로운 게 필요해지면 동네에서 먼저 구해요. 어렵게 수소문해서 정보를 얻거나, 비싸기만 한 업체를 찾아갈 필요가 없어요. 써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나눠주면 되고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요.
혜정 씨의 집 안 곳곳에는 중고거래로 구한 물건들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혜정 씨의 취향에 꼭 맞는 선반부터,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아이의 그림책 시리즈, 아이가 여전히 보물처럼 간직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장난감들까지. 한 가족이 그때그때 품었던 관심과 애정이 물건들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제는 아이도 무언가 필요해지면 새로 사달라는 말보다 당근에서 찾아보자는 말을 먼저 꺼낸다. 어느새 중고거래는 이들 가족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이 됐다.
원래부터 중고 제품을 자주 쓰셨어요?
아뇨. 처음엔 어떻게 남이 쓰던 걸 쓰나 싶었어요. 특히 아이가 어릴 땐 더 그랬죠. 아기 용품은 무조건 새 걸 사야 되는 줄 알았거든요. 몇 번 안 쓸 걸 알면서도 말이에요.
그러다 어떻게 중고거래를 시작하신 거예요?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가게 됐는데 기내용 유모차가 필요했어요. 며칠 쓸 건데 새로 사긴 아깝고, 주변에 빌릴 데도 딱히 없고. 그래서 혹시 몰라 당근을 봤는데, 괜찮은 게 진짜 저렴하게 올라와 있는 거예요. 그렇게 처음 사봤는데 상태가 너무 좋았어요. 여행 다녀온 뒤에도 몇 달은 더 잘 썼죠. 나중에 사이즈가 작아져서 당근에 다시 올렸더니 또 금방 팔리더라고요. 그렇게 한번 사고팔아 보니까 중고거래에 대한 거부감이 싹 사라졌어요. 당근하면서 만났던 사람들도 대부분 친절해서 신뢰도 금방 생겼고요.
기억에 남는 이웃분도 계세요?
있죠. 한 번은 제가 선반을 샀는데 생각보다 너무 크고 무거운 거예요. 하필 그때 남편도 출장 중이라 혼자 갔는데, 판매자분이 친절하게 1층까지 같이 내려다 주셨어요. 근데 이게 또 차에 안 들어가는 거 있죠. 와, 진짜 난감했어요. 그 모습을 판매자분이 보시더니 아예 본인 차 트렁크에 실어서 저희 집 앞까지 가져다주시겠다는 거예요. 너무 감사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그랬죠. 돈을 더 드리겠다고 했는데도 끝까지 안 받으셔서, 나중에 커피 기프티콘이라도 보내드렸어요.
혜정 씨는 또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며 거실 창가의 화분을 가리켰다. 식물 기르기를 취미로 삼은 지도 벌써 몇 해. 혜정 씨는 식물을 거래할 때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길어진다고 한다. “이거 키워보셨어요?”라는 질 문으로 시작해, 물은 얼마나 줘야 하고 햇빛은 얼마나 필요한지까지 이야기 나누다 보면 10분은 훌쩍 지나가곤 했다. 혜정 씨가 처음 길러보는 식물을 샀을 때, 한 이웃은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채팅 달라고 먼저 말을 건네기도 했다. “시들시들해졌을 때 채팅으로 물어봐서 겨우 살렸어요. 진짜 감사했죠.” 혜정 씨에게 중고거래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아니다. 낯선 이와의 짧은 만남 속에서도 마음이 스치는, 작지만 따뜻한 교류였다.
식물을 잘 키워줬으면 하는 마음일까요?
그런 것 같아요. 막상 저도 팔아보니까 똑같이 되더라고요. ‘얘는 어떻게 키운 애고, 이렇게 하면 더 잘 자라요’ 이러면서, 별 얘기를 다 하게 돼요.
혜정 씨에게 화분을 사 가시는 분들도 도움 많이 받아 가시겠네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그만큼 다른 사람들한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처음 식물 기르기 시작했을 때 제가 토분 나눔도 많이 받았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나중엔 저도 화분 사러 오신 분들한테 하나씩 더 챙겨드리게 되더라고요.
같은 취미라는 공감대가 있어서 더 챙겨주고 싶은 걸 수도 있겠어요.
맞아요. 아무래도 그런 게 있죠. 한 번은 저랑 같은 워킹맘한테 도움 준 적도 있어요. 아이가 할로윈 파티 때 입었던 스파이더맨 코스튬을 당근에 올린 적이 있는데요. 어느 날 아침 일찍 채팅이 온 거예요. 아이가 몇 시간 뒤에 어린이 행사에 가야 하는데 지금 당장 살 수 있겠냐고요. 그분의 다급함이 채팅으로도 느껴져서 ‘지금 당장 집 앞으로 갈게요!’ 답장 보내고 세수도 안 하고 뛰어나갔어요. 하하. 저도 급하게 아이 준비물 챙기는 마음을 아니까요. 다른 워킹맘한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니, 저도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인터뷰 중, 현관문이 열리더니 학교를 마친 아이가 들어왔다. 손에는 동네 문방구에서 샀다는 레이저 포인터가 들려 있었다. “이거 봐봐!” 자랑하는 아이에게 혜정 씨는 “또 뭐 사 왔어~ 용돈은 얼마나 썼는데?” 되물었다. 포인터에 건전지를 함께 끼우는 동안, 티격태격 장난스러운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잠시 후, 혜정 씨는 간식을 챙겨 아이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유쾌한 농담과 따뜻한 손길이 오가는 사이, 두 모자는 서로에게 스스럼없는 단짝 친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요즘 문방구가 아이 아지트예요. 학교 끝나면 꼭 친구들이랑 들렀다 오더라고요. 이것저것 파니까 되게 재밌나 봐요.” 혜정 씨에게도 동네 아지트 같은 장소가 있을지 물어보니, 곳곳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이와 자주 가는 근린공원, 아이의 축구 교실이 끝날 때마다 같이 꿀떡을 사 먹던 단골 떡집, 그리고 동네 사람들만 아는 오래된 골목 떡볶이집까지. 혜정 씨에게 동네는 이야기와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삶의 공간이었다.
동네를 되게 잘 아시는 것 같아요.
사실 신혼 때 살던 동네에서는 이렇지 않았어요. 그땐 집이랑 회사만 왔다 갔다 하면서 거의 자취하듯이 살았거든요. 동네는 그냥 집이 있는 곳, 그 정도였죠. 그러다 아이가 생기면서 학교나 학원을 데려다주다 보니까, ‘어? 동네에 이런 곳도 있었네?’ 싶더라고요.
아이를 키우면서 동네랑도 더 가까워지신 거네요.
맞아요. 또 아이 때문에 중고거래를 하다 보니 동네가 더 잘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이쪽 단지는 신혼집이 많아서 가구가 잘 팔리고, 저쪽 단지는 아이들이 많아서 학용품이 잘 팔리고, 이런 게 보이더라고요. 또 학부모들이 자주 가는 핫플 카페도 알게 됐고요. 사실 워킹맘이다 보니 다른 엄마들을 만날 시간이 많진 않잖아요. 이렇게라도 나랑 비슷한 엄마들이 동네에 많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냥, 동네가 훨씬 든든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든든하게 느껴진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요?
‘여기가 우리 동네구나’ 이런 느낌? 안정감이 느껴진달까요? 제가 시골 출신이라 어릴 땐 되게 작은 동네에서 살았어요. 이웃끼리 서로 다 알고 지내고, 집에 일이 생기면 옆집 가서 밥 얻어먹고, 그런 분위기요. 서울에 올라와서는 그런 ‘동네’라는 개념을 잠깐 잊고 살았는데, 아이 키우면서 다시 그 감각을 느끼는 거 같아요. 어느 정도는 느슨하게 연결된 느낌이요.
최근엔 어떤 상황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어요?
동네에 같은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많잖아요. 저희 애가 이번에 학년 올라가면서 로봇 창의라는 방과후 수업을 그만두고 3D 펜 미술을 새로 시작 했는데요. 수업 때 쓰던 로봇 창의 키트를 당근에 올렸더니 저학년 학부모가 그대로 사 가더라고요. 반대로 저희는 아이 선배가 쓰던 3D 펜을 샀고요. 이렇게 아이들이 크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엄마끼리 서로 주고받으니까, 동네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겠다 싶은 거예요. 그게 참 든든했어요.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그걸 특히 어디서 실감했냐면, 당근에 중고거래 말고도 알바 서비스가 있잖아요.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하원 도우미를 구해야 했거든요. 물론 경험 많은 시터분들도 좋지만, 왠지 동네 분이면 더 좋겠더라고요. 아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좀 더 가깝게 느낄 거 같았어요. 아마 그동안 중고거래하면서 동네에 애정이 쌓여서 그랬나 봐요. 결국엔 아이 학교 옆 아파트에 사시는 60대 중반 어머님을 선택했어요. 알바를 처음 시작하시는 분이었는데 같은 동네 분이라는 게 마음이 놓였어요. 지금도 동네에서 가끔 마주쳐요. 아이가 반갑게 인사하면 어머님도 “아유, 많이 컸네” 하시면서 간식 사 먹으라고 용돈 쥐여주실 때도 있어요.
아이가 동네 안에서 특별한 이웃 관계를 맺은 거네요.
그렇죠. 또 신기한 게 아이도 점점 크면서 동네 안에서 나름대로 자기 사회생활을 넓혀가더라고요. 처음엔 학교, 학원, 집, 이렇게 맨날 가는 데만 다녔는데요. 이젠 학원이나 학교에서 동네 친구를 새로 사귀더니, “엄마, 블록 카페란 데가 있는데 애들이랑 거기 가기로 했어” 알려주면서 친구들이랑 놀다 오기도 해요. 또 최근엔 친구들이랑 동네 공원에 타임 캡슐도 묻더라니까요. 요즘 애들은 동네에서 안 논다고들 하는데, 그래도 아직은 동네에서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요.
아이도 혜정 씨도 동네에 정이 많이 들었겠어요.
맞아요. 그래서 곧 이사 가야 되는데 멀리는 안 가려고요. 그냥 옆 단지로 옮기기로 했어요. 이미 정든 우리 동네를 떠나고 싶진 않더라고요. 요즘엔 이사 준비하면서 당근할 물건들을 아이랑 정리하고 있는데요. 조금 놀랐던 건, 예전엔 절대 못 버리겠다던 장난감들도 ‘당근으로 나눔할까? 이제 다른 동생들 줘도 될 거 같아’ 그러면서 정리하더라고요. 저도 우리 아이도, 필요 없는 건 놓아주고, 가볍게 시작하는 법을 배우나 봐요. 동네 안에서 같이 자라는 느낌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은 아이의 성장과 혜정 씨의 일상을 함께 지나온 것들이었다. 필요할 때 가볍게 들이고, 때가 되면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질 물건들. 혜정 씨는 그렇게 물건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일상을 더 다채롭게, 다른 이의 하루를 더 따뜻하게 만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네 어딘가를 오가고 있을, 또 다른 물건들 속엔 어떤 마음과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이 작은 교류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삶에 조금씩 다가가며, 어느새 서로에게 든든한 동네가 되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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